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생애 == 1459년,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안은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 국가|저지대 지역]][* 현재의 [[베네룩스 3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분쟁이 계속되어 1493년에 상리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 기간 중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한 후 [[안 드 브르타뉴|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린 [[샤를 8세]]의 섭정이었던 안이 샤를의 약혼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마르가레테]]를 돌려보내고 샤를과 브르타뉴의 안을 결혼시키는 일도 있었다.[* 이 결혼으로 [[브르타뉴]]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들의 종주권을 그 자신에게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는데, 특히 [[인스브루크]]와 [[티롤]]의 은광을 획득한 것이 중요한 성과였다. 1486년에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1494년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함으로서 [[밀라노 공국]]으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1495년 보름스 제국 의회에서 황권, 즉 중앙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으나 제국 내의 [[선제후]]들과 귀족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는 1504년에 반대파의 수장인 베르톨트 [[마인츠]] 대주교가 사망하고 독일 최대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의 신용협정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융통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푸거 가문의 막대한 재력은 막시밀리안의 후계가 계속 제위를 차지하게끔 절대적 기여를 한다.]. 1499년에는 [[슈바벤]] 전쟁에서 패전하여 바젤 조약으로 [[스위스]]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나[* 신성 로마 제국 권역에서까지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이 시기에도 황제가 타 군주의 영지에 간섭하지 못했다.], 1495년 아들 [[펠리페 1세|필리프]]가 [[후아나(카스티야)|카스티야의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훗날 스페인을 합스부르크에 편입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만 원래 신성 로마 제국 소유였던 네덜란드도 훗날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령 네덜란드|스페인 소속]]으로 넘어가게 된다.].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는 제국의 차대 황제이자 스페인 왕으로, [[페르디난트 1세]]는 차차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으로 즉위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1495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 정복을 저지했고,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와도 상당한 기간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교황]]이 황제 [[대관식]]을 해주기로 했으나 베네치아가 끼어들어 막시밀리안 1세의 안전한 통과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가까운 [[트렌토|트리엔트]][* 지금은 [[이탈리아]] 영토이나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영토였다.]에서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트리엔트 대주교가 대관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시기엔 교황의 황제 대관은 황제 즉위와 상관 없었다. 스스로 그 이전부터 황제 칭호를 썼고 아무도 트집잡지 않았다. 훗날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반을 닦아준 손자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사로잡고 [[볼로냐]]에서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고, [[페르디난트 1세]]는 [[아헨]]에서 [[독일왕]] 대관식을 치른 이후 황제로 따로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출 황제들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선거 결과가 나오면 바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막시밀리안의 진정한 시련은 [[밀라노 공국]]에서 일어났다. 모계를 통해서 비스콘티 가문을 잇고 합스부르크와 평생에 걸친 항쟁에 들어간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밀라노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를 추인한 브뤼셀 조약을 통해서 밀라노 공작령을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 영지는 뒤에 손자 카를 5세가 수복할 때까지 프랑스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손자인 카를 5세에게 스페인 왕위와 제국의 제위를 순조롭게 물려주려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성하는데 전념하다가 1519년 1월에 상 오스트리아의 벨스에서 사망하였다. 그해 말 손자 카를 5세는 [[로마왕]]에 추대되었고 그로부터 1년 뒤 선출된 로마 황제로 즉위했고, 10여 년 후에는 교황에 의해 마지막으로 대관식까지 치뤘다.[* 14세기 [[카를 4세]] 시기부터 황제 즉위는 로마 교황의 대관이 필요없다. [[선제후]]의 투표만으로도 확정된다.]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탈리아 원정비용을 제공한 야코프 푸거에게 제국백작을 수여했다. 훗날 야코프 푸거는 장손자 [[카를 5세]]의 황제 선거자금 대출을 해줘서 당선에 공헌했고, [[면죄부]] 판매자금을 대출과 로마교황청 송금을 맡아서 [[종교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말년에는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약화시키고자 둘째 손자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의 딸 언너와, 셋째 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마리아]]를 울라슬로 2세의 상속자 [[러요시 2세|러요시]]와 결혼시켰다. 당시에는 그저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보헤미아와 헝가리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유럽 영향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정도의 결혼 정책이라 여겼으나 러요시 2세가 후사도 없이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졸지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오는 행운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교황청에서 [[마르틴 루터]]를 체포하고 처벌하라는 압력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란츠크네히트]]를 창설하는 등 군사적인 업적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중요한 군사개혁과 행정개혁[*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을 10개의 관구(Reichskreise)로 나눈 것이 막시밀리안 1세의 업적이다. 또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을 공식 국호로 사용했으며, 선출 황제(Erwählter Römischer Kaiser)를 자처하며 황제의 즉위에는 교황의 대관이 필요없다고 선언한 것도 막시밀리안 1세였다.]을 실속있게 시행했으며 중세적 사고가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고에도 관대하였으며, 예술과 문학 및 과학의 발전에도 상당한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군주의 기사도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도 믿음직하지 못했기에 결국 열세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어 이탈리아에서의 이익 확보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막시밀리안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그 많은 [[결혼]]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 당대에 얻은 것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이것은 후대에 가서 엄청난 효과와 역사적 사건들을 야기하지만. 그의 유업은 손자인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계승되어, [[카를 5세]]는 [[스페인]], [[이탈리아 반도]], [[아메리카]], [[필리핀]]을 추가하여 '''합스부르크 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을 이룩하는 위업을 세우고,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가 시킨 결혼 덕분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추가하여 동유럽을 호령할 [[합스부르크 제국]]을 출범시켰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항목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